중국 성지순례
최우석(예로니모)
“철의 장막 소련, 죽의 장막 중국”을 들으며 중고등학교를 다녔다. 철저히 교류가 단절되었던 시절 공산주의 체제로 캄캄하였다. 특히 천주교 역사에서 김대건 신부가 중국에서 사제 서품을 받고, 초대 주교들이 중국을 통하여 건너왔기에 궁금하였다.
1992년 양국 수교 후 몇 번 중국 여행을 했지만 성당에 방문할 기회는 없었다. 중국 가톨릭문화와 성당을 보고 싶었다. 마침 본당에서 중국 성지순례 공지를 듣고 반갑게 신청하였다.
금요일 공휴일을 끼고 주말을 이용 한 3박 4일이라 월요일 하루 연차만 내면 되니 금상첨화였다. 태원성지 성당과 태항산 관광이다.
아침에 성당에 모여 인천공항으로 보좌신부님 포함 25명이 버스로 이동하는데 한명도 지각이 없었다. 공항 라운지 무료 이용권을 사용하였다. 이용자기 많아 입장하는데 1시간이나 대기하다니 격세지감을 느꼈다.
중국 석가장 국제공항 도착 후 30인승 리무진 버스로 이동하였다. 가는 길이 깨끗하고 공기도 맑아 옛날보다 많이 변화되었음을 직감 할 수 있었다.
점심은 중국요리인데 한식 화 되어 향료 냄새가 안 났다. 여전히 한 테이블에 기본 10가지 요리로 한국인 입맛에 맞게 조리되었다.
태원 주교좌성당인 성모무염원죄성당에서 6시 연합미사를 주교님과 지도신부인 성당보좌신부님 공동으로 집전하였다. 중국 신자들도 많이 참석하였다. 성당은 1905년에 재건되었으며, 전적으로 붉은 건물 사이사이에 흰색 선으로 장식된 고대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축물이다. 성당 외벽에는 ‘천주당’ 이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보이고, 독특하게 사자 두 마리가 조형되어있다.
사람들이 성당 복도에서 이발, 발마사지 봉사, 침술 치료 봉사 등을 하고 있었다.
저녁에 호텔 방 배정은 코골이로 남에게 피해를 주기에 싱글 룸을 신청하였다. 나이가 들면서 점차 조금씩 심해진다. 옆에 사람이 아침에 일어나 힘들었다고 하면 마음이 불편했었다.
성모칠고산 언덕에서 십자가의 길을 할 때, 미리 준비되어 있는 십자가를 서로 돌아가면서 들고 기도 하였다. 14처를 마치고 언덕위의 상천지문(上天之門)을 통과하여, 정상 칠고산 성당에서 미사를 하였다. 성당은 고궁인 태화전의 건축양식을 모방하여 완전한 중국식 전통 건축양식으로 기세가 웅장하고 장관을 이루었다. 그런데 그 정상에 있는 화장실은 문도 없는 재래식으로 냄새가 고약하고 분뇨들이 적나라하게 보였다.
미사 후에 내려 올 때는 상천지문이 죄인지탁(罪人之托)의 문으로 명명 되었다. 미사를 통하여 주님께 모든 죄를 내려놓고 깨끗한,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는 의미이다.
양가보 성당은 1900년 의화단운동 당시 극심한 박해를 받은 곳으로 역사적인 가톨릭 성당이었다. 프랑스 파리외방선교회 소속 신부들과 수도자들, 그리고 수백 명의 중국신자들이 체포되어 처형당한 곳이다. 중국 내 순교의 장소이자 박해의 중심지로 신앙의 상징이 되었다.
지하에 역사관이 있었다. 그 당시의 사진, 편지, 서적 등 사료기록의 규모가 대단히 잘 정리되어 있었다. 중국 본당 신부님의 배려로 지하의 마더 데레사 수녀님 기념관에서 최(세례자요한) 지도신부님의 주관으로 침구 예식을 하였다. 수녀님의 손에 정성껏 입을 맞추며 가정과 세계 평화를 위하여 전구를 청하며 기도했다.
고성영 천주당은 138명이 불타 순교하였다고 한다. 의화단 운동과 문화대혁명 시기에 두 차례나 파괴되었지만 신자들의 힘으로 재건되고 복원하여 지금의 성당은 1989년 고딕양식으로 멋지게 건립되었다. 시계탑은 높이가 27미터로 고성영촌(村)의 랜드 마크이며, 제대 아래는 당시 신자들이 순교한 장소라고 한다. 성당과 마을은 여전히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고, 대부분이 순교자의 후손이라고 했다.
점심은 성당 식당에서 했는데 음식을 정성껏 준비해 주었다. 특히 내륙지방인데도 생선 간장조림은 담백하고 신선하였다. 성당을 후원해 주는 의미로 이용한다고 한다. 맥주는 사다가 먹어야 했는데, 모두 목이 말라서 너무 시원해 하였다.
칠고산 정상 성당에서 함께 미사 했던 중국 신부님과 남녀 대학생들이 식당으로 들어왔다. 미사 후에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던 인연이다. 그들도 매우 활발하고 명랑하였다. 캔 맥주를 팩으로 사와 건배를 하며 즐겼다. 요즘 젊은이들의 패기와 활기를 느꼈다.
주일 아침 성령강림 대축일 미사를 했다. 중국에서 부활시기의 마침표를 찍은 것이다.
앞줄에 앉아 빨리 나가게 되어 ‘거 성체’로 양 영성체를 하고 묵상하니 감동이었다.
성령 칠은 말씀 카드도 뽑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일명 동양의 그랜드 캐년이라 불리는 태양산 협곡을 하이라이트로 관광하였다.
통천협으로 이동하여 전동 카, 케이블카를 타고 산 중턱에 있는 인공 호수에서 유람선 탑승을 했다. 전동 카는 2대로 나누어 이동하고 케이블카는 6명 씩 타고 아래를 내려다보니 웅장한 산세와 짙어가는 신록을 느꼈다.
유람선은 25명이 한 배에 타고 푸른 물결의 호수 주위를 한 바퀴 돌며, 마주 오는 배와 환호를 터트렸다.
유람선 타려고 대기 줄에서 기다리며 여러 가지 포즈로 사진을 번갈아 찍었다. 한 사람(곽 스테파노)의 재치로 여러 사람들이 즐거워하였다.
하산 후에 발 마사지를 1시간 30분 동안 하여 피로는 풀리는 듯 했다. 봉사료가 만만치 않아 물가가 많이 오른 느낌이었다.
식사 후 출발하여 저녁 11시가 넘어 석가장 호텔에 도착하였다. 돌아오면서 버스 안에서 각자의 소감 발표를 하며 지루함을 줄이고, 서로를 이해 할 수 있는 진솔한 시간이었다.
마지막 날 새벽 미사와 조식 후에 공항으로 이동하여 돌아왔다. 저가 항공인데도 거의 정시에 출발하였다. 많이 변화되었음을 실감하였다.
오래 전에 베트남에 성지 순례를 간적이 있는데, 돌이켜 보니 유럽 스타일에 중국 성당의 분위기도 있었다.
역시 중국은 아시아의 대국답게 규모가 컸다. 1986년에 방문 했을 때, 북경의 천안문 광장에서 도로의 규모, 자금성, 만리장성에 감탄 했던 기억이 새삼 떠올랐다.
본당 신자들, 특히 남성 구역장들과 함께 한 은총의 중국 성지순례 시간이었다.
중국 태원 성지순례 기행문
2025년 6월 6일, 희망 순례의 첫발을 내딛다
2025년 희년을 맞아 "희망 순례를 선포하는 교회"라는 표어 아래, 중국 산서성 태원 일대의 천주교 성지를 순례했다. 성지 순례하면 으레 유럽이나 서구의 성지를 떠올리게 되는데, 중국 성지순례는 쉽게 그려지지 않았다. 더욱이 중국은 공산국가여서 종교를 허용하지 않는다고 알고 있지 않았던가! 그런데 천주교 신앙이 허용될 뿐 아니라 마을 전체가 교우촌을 이루며 활발하게 신앙 활동을 한다니, 눈으로 직접 확인해보고 싶은 호기심이 일었다. 더구나 한국 천주교가 중국으로부터 서적이나 문물이 전해졌고, 우리 선조들이 그것들을 연구하고 받아들였으니 모태(원형)가 중국인 것만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런 기대를 품고 이번 여행은 시작되었다.
이른 아침 6시, 성당 앞에서 버스를 타고 인천공항으로 향했다. 공항에서 탑승 수속을 마친 후 아침 식사를 하고, 제주항공 7C8801편으로 11시 20분에 출발하여 중국 정주의 신정 공항에 도착하였다. 입국 수속을 마치고 가이드를 만나 점심 식사를 한 후, 약 3시간 30분을 달려 태원으로 이동하였다.
태원에 도착한 우리는 천주교 태원교구의 중심이자 산서성 천주교의 본산인 태원주교좌성당(성모무염원죄성당)을 찾았다. 이곳은 1900년 의화단 사건 당시 수많은 순교자들이 탄생한 태원 학살의 중심지 중 하나였다. 당시 의화단의 포위 공격으로 외국 선교사들과 중국인 신자들이 무차별적으로 살해당하였으며, 이 사건은 '태원교안'으로 불리며 중국 천주교 박해의 상징이 되었다.
그러나 이후 성당은 1905년에 재건되어 로마네스크와 신고딕 양식을 혼합한 독특한 건축미를 갖추게 되었고, 1946년 교황청에 의해 정식 대교구로 승격되었다. 현재는 중국인 주교가 주재하며, 수많은 신자들이 이곳에서 신앙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중국인 교우들과 함께 주교님의 주례로 거룩한 미사를 드릴 수 있었고, 미사 후 주교님과의 기념사진 촬영과 성당 곳곳을 둘러보며 깊은 인상을 받았다. 특히 신자들의 진지한 기도, 한방과 마사지로 병든 이를 돌보는 봉사자들, 무료 이발로 나눔을 실천하는 이들의 얼굴은 참된 신앙의 실천을 보여주고 있었다.
6월 7일, 순교의 흔적을 따라가는 길
이튿날 우리는 먼저 양가보성당을 방문했다. 지금은 주변이 고층빌딩으로 둘러싸인 도심 한가운데 위치해 있는 이 성당은 천주교가 중국 내륙 깊숙이 자리 잡은 초기 선교지 중 하나로, 1900년 의화단 운동 당시 극심한 박해를 받은 장소이다. 당시 성당은 파괴되었고, 수많은 신자들이 목숨을 잃었다. 지하 박물관에는 그 당시의 사진, 교리서들과 서적, 편지, 순교자들의 복식 등 많은 사료가 전시되어 있었다. 전시물을 둘러보며, 조선에 천주교가 처음 전해질 때 교리서와 경전들을 보며 중국을 통해 "바로 이런 고서들이 전해졌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이벽, 이승훈, 소현세자 같은 조선의 선구자들이 떠올라 숙연해졌다.
이후 우리는 칠고산(七苦山)에 올랐다. 성모 마리아의 일곱 고통을 묵상하는 이 산은 순례자들이 십자가를 메고 오르며 14처 기도를 바치는 성지이다. 정상을 향해 걸으며 기도한 후, 우리는 산꼭대기에 세워진 칠고성모대전에 도착했다. 중국 전통 건축 양식을 바탕으로 지어진 이 성당은 고색창연하고 위엄 있는 외관을 지니고 있었으며, 내부는 성화들로 가득해 거룩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 이질적인 아름다움은 유럽의 고딕 성당에서 느꼈던 경외감과는 또 다른 감동을 주었다.
다음으로 향한 곳은 산시성 태원시 진위안구 고성영촌에 위치한 고성영천주당이었다. 이 성당은 강희제 시대인 1661~1722년에 건립된 고풍스러운 성당으로, 의화단 사건 당시 가장 참혹한 순교의 현장이 되었다. 제대 아래는 당시 신자들이 순교한 장소로, 기록에 따르면 1900년 138명의 신자가 이곳에서 불에 타 순교했다고 한다.
현지 설명에 따르면 현재 이 지역에는 약 800여 명의 신자들이 남아 있으며, 대부분이 순교자의 후손이라고 한다. 가톨릭의 역사는 이곳 중국에서도 예외 없이 순교자들의 피로 지켜지고 자라났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성당과 마을은 여전히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고, 그 고요한 풍경 속에 깃든 신앙의 숨결이 우리를 압도했다.
애국교회와 지하교회가 공존하는 중국의 종교 상황을 전부 알 수는 없었지만, 태원에서의 짧은 체험은 놀라운 것이었다. 종교의 자유가 완전히 허용되는 중국을 꿈꿔보며, 서구 못지않은 대국의 풍모가 물씬 풍어나는 중국 성지순례를 다시 올 수 있길 기대해본다.
이곳 성지순례를 끝으로 아쉬운 중국 순례의 전반부를 마치고, 우리는 태항산으로 향하기 위해 임주로 4시간 30분 동안 이동했다.
6월 8일, 태항산의 장엄함과 자연 속 영성의 회복
셋째 날 아침, 호텔에서 미사를 드리고 조식을 마친 후 우리는 중국의 4대 명산 중 하나인 태항산(太行山)으로 향했다. 태항산은 동서로 400km에 이르는 웅대한 산맥으로, 깎아지른 절벽과 깊은 협곡, 그리고 동양의 그랜드 캐니언이라 불릴 만큼 장관을 자랑한다. 특히 우리가 찾은 통천협은 유람선을 타고 협곡을 감상한 후, 케이블카를 타고 정상에 오를 수 있는 코스로 유명하다. 산 정상에서 유리 테크(유리다리)를 깔아놓은 잔도를 걸으며 아찔한 스릴과 함께 자연의 위대함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정오 무렵 정상에서의 점심 식사는 그 어느 때보다 경건한 자연의 축복처럼 다가왔다. 하산 후 우리는 임주로 돌아와 전통 중국 마사지를 체험하고, 저녁 식사 자리에서 함께한 일행들과 술 한잔 나누며 여행의 회포를 풀었다. 낯선 이국이라는 공간, 신앙이라는 연결고리, 그리고 정겨운 교우들과의 우정이 어우러지며 즐거움이 더해졌다. 늦은 밤 버스를 타고 정주로 향하며 우리는 돌아가며 여행에서 느낀 점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고, 이는 또 다른 은총의 순간이었다.
6월 9일, 귀국길에 오르며
넷째 날 아침, 마지막 미사를 드리며 이번 순례의 여정을 마무리했다. 짧은 여정이었지만 함께한 이들이 모두 평소 친밀하고 신앙 안에서 하나였기에 더욱 즐겁고 깊은 시간이었다. 여러 곳을 압축적으로 둘러보며 집중력 있게 체험했기에 더욱 의미 있었다. 무엇보다 중국 태원 지역 천주교의 살아 있는 모습을 직접 눈으로 보고, 그들의 신앙과 공동체 정신을 체험하며 깊은 감동을 받았다. 또한 태항산이라는 대자연의 품속에서 신앙이 인간의 내면뿐 아니라 자연과도 조화를 이룰 수 있음을 체감했다. 다음엔 태항산을 단독 여행으로 깊이 경험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번 순례는 단순한 여행을 넘어, 과거와 현재, 인간과 신, 자연과 공동체가 만나는 진정한 영적 여정이었다.